
- 개봉: 2005
- 감독: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
- 장르: 액션
- 출연: 올랜도 블룸, 에드워드 노튼, 에바 그린, 리암 니슨, 제러미 아이언스, 가산 마수드
- 평점: 메타크리틱 63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73%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은 12세기 십자군 시대를 배경으로, 신앙과 권력,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의 여정을 그린 대서사시다. 리들리 스콧 특유의 웅장한 영상미와 역사적 사실을 결합해,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전쟁 속에서도 인간이 지켜야 할 ‘양심’과 ‘자비’의 가치를 탐구한다. 특히 감독판은 극장판에서 잘려나간 장면들이 복원되어 인물의 심리와 정치적 갈등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왕은 신하를 움직이지만, 영혼은 너의 것이다
프랑스의 한 시골 대장장이 발리앙은 아내를 잃고 절망 속에 살아간다. 어느 날 성지 예루살렘에서 온 기사 고드프리가 자신이 발리앙의 아버지라 밝히며, “신의 용서와 구원을 원한다면 성지로 가라”고 권유한다. 발리앙은 처음엔 망설이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성지로 향한다. 그곳은 겉으로는 신의 도시라 불리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정치적 음모가 가득한 곳이었다.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나병에 걸렸지만, 이성과 관용을 중시하는 현명한 지도자였다.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살라딘과의 협정을 유지하며, 불필요한 전쟁을 막으려 했다. 보두앵은 발리앙에게 깊은 신뢰를 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왕은 신하를 움직이지만, 너의 영혼은 너의 것이다. 신 앞에서 심판받을 때, ‘누가 시켜서 그랬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이 말은 발리앙의 인생을 바꾼다. 그는 이후로 신념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어떤 권력의 명령도 자신의 도덕을 침해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보두앵의 죽음과 함께 평화는 무너진다. 권력욕에 눈먼 기 드 뤼지냥과 레이놀드가 이슬람 상단을 공격해 전쟁의 불씨를 지핀다. 살라딘은 이에 맞서 대군을 이끌고 성지를 포위한다.

보두앵이 남긴 관용의 정신과 대비되듯, 기와 레이놀드는 무모하고 오만하게 행동한다. 그들의 무능함은 결국 예루살렘의 파멸로 이어진다. 발리앙은 왕이 아닌 ‘양심의 기사’로서 마지막까지 시민들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살라딘과 맞서 싸우기보다 협상을 택하고, 전쟁이 아닌 생명을 택한다. 살라딘 또한 적임에도 불구하고 발리앙의 결단을 존중하며, 그와 같은 존엄한 인간을 경외한다. 전쟁이 끝난 후, 발리앙은 프랑스로 돌아가 조용히 살아가지만, 예루살렘의 땅에는 여전히 신의 이름으로 피가 흐른다.
아무것도 아니야. 전부이기도 하고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은 단순한 십자군 전쟁 영화가 아니다.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신앙과 양심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을 치열하게 탐구한 작품이다. 특히 발리앙의 서사는 “영웅의 여정”이라기보다 “양심의 여정”에 가깝다. 그는 왕의 명령보다 자신의 영혼을 따르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보두앵 4세의 말처럼, 그는 신의 심판 앞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할 줄 아는 인간으로 남는다.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의 관계는 이 영화의 도덕적 축을 이룬다. 병든 몸으로도 평화를 지키려는 보두앵, 그리고 적의 종교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살라딘은 서로 다른 신을 섬기지만, 모두 ‘자비’라는 같은 언어를 말한다. 반면 기와 레이놀드는 권력을 신의 뜻으로 포장하며 자신들의 오만을 정당화한다. 리들리 스콧은 이 대비를 통해 종교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신의 뜻을 독점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비극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전쟁의 스펙터클보다도 인물 간의 내적 갈등을 깊이 있게 그린다는 점이다. 발리앙이 칼을 쥐는 이유는 명예나 복수가 아니라 ‘정의와 양심’이다. 그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십자가를 세우고 “도시를 파괴하라” 명령하지 않는 장면은, 종교를 초월한 인간적 숭고함을 상징한다. 그것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연민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작품은 또한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은 서로 다른 진영의 왕이지만, 모두 백성을 위해 싸운다. 반면 레이놀드와 기는 개인의 탐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스콧 감독은 이러한 대조를 통해 “진정한 지도자란 신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양심으로 결단하는 자”임을 강조한다.
오늘날까지도 예루살렘은 종교와 정치, 역사적 이해관계로 인해 끊임없는 분쟁의 상징이 되고 있다. 영화 속 비극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킹덤 오브 헤븐》은 그 혼돈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라는 메시지다.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은 거대한 전쟁의 이야기를 빌려 인간의 본성과 양심, 그리고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다. 화려한 전투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혼란의 시대에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지키려 한 이들의 모습이다. 발리앙이 보두앵 4세의 가르침처럼 “영혼은 너의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선택한 길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