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 1966
감독: 잉마르 베리만
장르: 드라마, 심리
출연: 비비 안데르손, 리브 울만
평점: 메타크리틱 86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91%
《페르소나》는 인간 내면의 분열과 자아의 경계를 탐구하는 잉마르 베리만의 대표작이다. 대사보다 침묵이, 행동보다 응시가 많은 이 영화는 인간이 ‘자신’과 마주할 때 얼마나 불안하고도 복잡한 존재인지를 냉정하게 드러낸다. 스크린 속 두 여성의 얼굴은 점점 하나로 겹쳐지고, 관객은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인간의 본질을 목격한다.
침묵 속의 두 얼굴
무대 위 배우 엘리자베스는 공연 중 갑자기 말을 잃는다. 의사는 그녀에게 신경적 증상이라 말하며 요양을 권한다. 병원에서는 간호사 알마가 그녀의 간병을 맡게 된다. 처음엔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로 시작하지만,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묘한 유대감을 쌓아간다. 엘리자베스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녀의 침묵은 언어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고, 알마는 그 침묵에 자신의 내면을 비추기 시작한다.
요양지의 고요한 바닷가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관찰하고 흡수하듯 닮아간다. 알마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점점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엘리자베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냉정한 관찰이었다. 알마는 자신이 진심을 쏟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배우로서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인식은 분노와 혼란을 낳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 후반부, 그들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서 하나로 겹쳐지는 장면은 베리만의 철학적 선언과 같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를 잃는다. 알마는 엘리자베스의 고요 속에서 자신이 감추어왔던 욕망과 죄책감을 마주하고, 엘리자베스는 알마의 진심 앞에서 자신의 냉담함을 목격한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상대의 거울 속에서 ‘나’와 ‘너’의 경계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자아의 해체와 인간의 진실
《페르소나》는 언어를 믿지 않는 영화다. 인물들은 말보다 표정, 표정보다 침묵으로 이야기한다. 베리만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세워 두 여성의 얼굴을 정직하게 담고, 그들의 표면 아래에서 들끓는 내면의 혼돈을 조용히 비춘다. 엘리자베스의 침묵은 단순한 병의 증상이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였다. 반면 알마는 끊임없이 말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려 하지만, 결국 그 말들이 진실을 뒤덮는 가면이 되고 만다.
영화는 배우와 인간, 가면과 진실의 경계를 허문다. 엘리자베스가 배우로서 쓴 가면을 벗지 못하는 순간, 알마 역시 자신의 내면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자아의 투영이며, 서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포와 욕망을 들춰낸다. 베리만은 이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는 유동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시각적으로 영화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흑백의 대비는 인간의 내면처럼 차갑고 섬세하며,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진실이 깨어난다. 대사 대신 반복되는 정지된 이미지, 비틀린 초점, 실험적인 컷 편집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다. 그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시각화한 시도이며,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정체성을 되묻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페르소나(Persona)’는 라틴어로 ‘가면’을 뜻한다. 베리만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쓰는 수많은 가면들, 그리고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을 묻는다. 엘리자베스의 침묵과 알마의 고백은 결국 동일한 질문을 향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인 물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스며 있는 근원적 의문이다.
결말의 여운과 영화의 울림
《페르소나》는 서사가 아니라 감정으로 기억되는 영화다. 인물들의 관계는 명확히 해석되지 않고, 장면과 대사마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머문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닮아 있다. 우리는 모두 알마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지만, 동시에 엘리자베스처럼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이 모순된 두 감정이 겹쳐질 때, 인간의 복잡함이 완성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다시 촬영 장비를 비추며 관객에게 묻는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영화인가, 혹은 너 자신의 이야기인가?” 베리만은 관객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 초대한다. 영화는 끝나지만 질문은 남는다. 우리가 쓰는 가면이 진짜 얼굴보다 더 오래 남는다면, 그것은 과연 거짓일까 진실일까.
《페르소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그림자를 응시하며, 예술이란 결국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임을 일깨운다. 베리만의 냉철한 시선은 인간의 모순을 찢어놓지만, 그 속에서 비로소 인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이 영화는 불편하고 난해하지만, 그만큼 진실하다.

《페르소나》를 본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해부하는 일과 같다. 쉽게 이해되거나 위로받을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인간의 본질을 가장 예리하게 파고든 작품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 영화는, 그 침묵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낸 ‘진짜 나’의 얼굴을 비춘다. 한 번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모호함 속에서 얻는 통찰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간다. 그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비로소 영화가 끝나고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