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연도: 2002년
- 감독: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
- 장르: 드라마 / 전쟁 / 실화 기반
- 출연: 에이드리언 브로디, 토마스 크레취만, 프랭크 핀레이, 모린 립먼 등
- 평점: 메타크리틱 85점, 로튼토마토 신선도 95%
《피아니스트》는 나치의 점령하에 놓인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평온했던 일상이 전쟁으로 무너지고 가족을 잃은 채 홀로 생존을 이어가야 하는 주인공의 여정은, 음악이 인간에게 주는 위로와 존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피아노 건반 위에 담긴 선율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저는 피아니스트 입니다
바르샤바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블라덱 스필만은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다. 그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 팬들과 교류하며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독일군의 침공으로 폴란드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그의 삶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식당 출입이 금지되고, 공원을 거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차별과 폭력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스필만과 그의 가족은 결국 게토에 수감된다.
게토 안에서 사람들은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린다. 블라덱은 카페에서 연주를 하며 가족을 부양하려 하지만, 모든 것이 점점 무너져 내린다. 가족을 지키려 애쓰지만 결국 그들은 수용소로 끌려가고, 블라덱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그는 건축 현장에서 노역을 하며 버티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게토를 탈출한다. 이후 폴란드인 친구들의 은신처에 숨어 지내지만, 배신과 의심이 교차하는 세상에서 안식은 오래 가지 못한다.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마지막 시련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찾아온다. 폭격과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며 버려진 저택에 몸을 숨기던 블라덱은 뜻밖에도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와 마주한다. 그는 블라덱의 직업이 피아니스트라는 말을 듣고 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한다. 블라덱이 손끝으로 건반을 울리는 순간, 전쟁의 잔혹함을 초월한 인간성과 예술의 힘이 저택 안을 가득 채운다. 호젠펠트는 그를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음식을 건네며 은밀히 보호한다.
마침내 독일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들어오면서 블라덱은 해방을 맞는다. 하지만 가족은 모두 사라졌고, 지난 3년간의 도피와 고통의 기억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한다. 삶은 무너졌지만, 음악은 여전히 그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신은 우리 모두가 살게 하셨네
많은 전쟁 영화들이 총칼과 포화 속 전장을 그린다면, 《피아니스트》는 도시 한가운데서 무너져가는 일상의 조각들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보다 오히려 더 끔찍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평범했던 삶이 하루아침에 부서지고, 인간의 존엄조차 짓밟히는 상황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감독은 냉정하게 묘사한다.
영화의 가장 큰 울림은 ‘삶의 연속성’에 있었다. 주인공 스필만은 가족을 모두 잃고 굶주림 속에서 쓰러질 뻔했지만, 끝내 살아남았다. 그를 지탱한 것은 단순한 본능만은 아니었다. 피아노라는 존재, 음악에 대한 사랑이 그의 내면을 붙잡아주었다. 피아노가 없을 때조차 상상 속에서 연주하며 살아갈 이유를 찾았고, 호젠펠트 앞에서 다시 건반을 두드리는 순간, 그는 생존 그 자체를 증명했다.
또한 영화는 집단의 광기 속에서 휩쓸리지 않는 개인의 양심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일깨운다. 대부분의 독일군과 일부 폴란드인들은 무감각하게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호젠펠트는 달랐다. 그는 적군의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스필만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전쟁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때에도 인간성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결국 소련군 포로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역사는, 선행이 반드시 보답받는 것은 아니라는 냉혹한 현실 또한 드러낸다.
스필만의 고통스러운 여정은 우리에게 전쟁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총성이 멎은 후에도 파괴된 것은 삶과 공동체,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뢰다. 그러나 동시에 감독은 메시지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전쟁은 인간을 부수지만, 살아남은 자는 다시 일상을 만들어간다. 스필만이 무대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다. 그것은 삶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과도 같다.
《피아니스트》는 전쟁 영화의 틀을 부수고 인간이 어떻게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내고 삶의 의미를 찾는지를 탐구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보는 이를 절망 속에 끌어내리면서도, 동시에 희망의 불씨를 손에 쥐어준다. 스필만의 생존은 한 개인의 이야기이면서도, 전쟁 속에서 무너진 수많은 일상의 대변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이 인간을 어떻게 살아 있게 하는지를 강렬하게 증명해낸다.
《피아니스트》는 잔혹한 시대를 견뎌낸 한 인간의 이야기이자, 음악이 가진 구원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총성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건반의 울림은 우리에게 삶의 의지를 일깨운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인간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피아노 선율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가슴을 울리는 이 이야기를, 꼭 직접 마주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