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진 남자, 하워드 휴즈. 그는 영화판에서 전쟁을 치르고, 비행기 설계도로 시대를 들썩이게 만들며, 미국의 산업과 대중문화 한복판을 질주한다. 그런데 이 거대한 성공담은 박수로만 끝나지 않는다. 문손잡이를 닦고 또 닦는 손끝, 반복되는 주문 같은 말,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침묵이 같은 화면 안에 공존한다. 《에비에이터》는 “위대한 인물 전기”라는 안전한 틀을 벗어나, 야망이 어디까지 사람을 끌고 가는지, 그리고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세계가 얼마나 위태롭게 흔들리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개봉: 2004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장르: 전기, 드라마, 시대극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케이트 블란쳇, 케이트 베킨세일, 존 C 라일리, 알렉 볼드윈, 앨런 알다, 주드 로
평점: 메타크리틱 77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86%
기록을 세우는 손, 문을 만지며 떨리는 손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격리’라는 단어를 배우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곧바로 1920년대 후반의 할리우드로 점프한다. 하워드 휴즈는 공중전 장면을 진짜처럼 찍겠다는 집념으로 《지옥의 천사들》 제작에 자신의 자금과 명성을 걸고, 촬영 방식부터 장비까지 밀어붙인다. 유성영화의 등장 이후에는 다시 한 번 방향을 틀어 작품을 ‘시대의 언어’에 맞추려 하고, 그 과정에서 제작비와 일정은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솟는다. 성공을 해도 만족은 짧고, 다음 목표가 곧바로 눈앞에 놓인다.
이후 휴즈의 전장은 항공업으로 옮겨간다. H 1 레이서를 직접 몰아 속도 기록을 세우고, 세계 일주 비행으로 대중의 찬사를 얻는다. 동시에 TWA를 키우며 항공 시장의 판을 바꾸려 한다. 그가 집착하는 것은 “가능한가”가 아니라 “내가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는가”에 가깝다. 문제는 그의 내면도 같은 방식으로 가속된다는 점이다. 결벽과 공포, 반복 행동이 점점 생활을 잠식하고, 관계는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캐서린 헵번과의 만남은 한때 숨통을 틔워주지만, 휴즈는 사랑을 유지하는 방식조차 일처럼 다뤄버린다. 결국 헵번은 떠나고, 아바 가드너와의 관계도 격렬한 감정 소모 속에서 균열을 키운다.
중반부의 핵심은 ‘기술’과 ‘정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팬암의 후안 트리피와 항공 노선을 둘러싼 싸움, 이를 뒷받침하는 상원의 공청회 압박은 휴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 와중에 그는 거대한 비행정 헤라클레스 비행선을 추진하고, 정찰기 시험비행에서 큰 사고를 겪는다. 몸은 부서지고, 마음은 더 깊이 폐쇄된다. 영화의 마지막, 공청회장에서 휴즈는 자신을 향한 의혹에 반격하며 ‘증언’으로 판을 뒤집는다. 하지만 승리의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접혀든다. 떠들썩한 성공 뒤에 남는 것은, 반복되는 문장과 강박의 고리다. “다가오는 미래”처럼 보였던 남자는, 스스로 만든 방 안으로 들어가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색의 시간표로 인물을 해부하는 스코세이지의 방식
처음 《에비에이터》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색이 이상할 정도로 의도적이다”라는 것이었다. 초반 1920년대 장면은 빨강과 청록이 도드라지고, 초록은 묘하게 다른 색으로 밀려난다. 처음엔 단순한 감독의 취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코세이지와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이 초기 2색 테크니컬러와 이후 3스트립 테크니컬러의 느낌을 디지털로 재현하려고 ‘색의 연대기’를 설계한 결과였다. 영화의 시간대가 넘어갈수록 색이 점점 풍부해지는 구조가, 휴즈가 쌓아올린 세계의 화려함과 동시에 불안의 팽창을 같이 보여준다.
연출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와 다르다. 스코세이지는 휴즈를 미화하기보다 “기능하는 천재”와 “붕괴하는 인간”을 같은 프레임에 묶어둔다. 편집은 리듬감 있게 달리다가도, 특정 순간 갑자기 반복과 정지에 가까운 체감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 손을 씻거나 물건을 닦는 장면에서는 컷 분절이 촘촘해지면서도 행동 자체는 제자리걸음을 한다. 화면은 움직이는데 서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느낌이 생기고, 관객은 휴즈의 사고방식에 끌려 들어간다. 나는 그 순간마다 ‘영화가 빠르게 진행되는데도 답답하다’는 모순적 감각을 느꼈고, 그 것이 바로 이 인물의 외면과 내면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각본도 영리하다. 존 로건의 시나리오는 사건을 나열하기보다, 휴즈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강박이 어떻게 논리처럼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완벽해야 한다”는 요구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시스템이 되고, 그 시스템이 사람과 관계를 잘라낸다. 그래서 후반 공청회 장면이 더욱 흥미롭다. 일반적인 법정 드라마처럼 통쾌함만 남기지 않고, 승리의 언어가 곧바로 개인의 고립으로 이어진다는 여운을 남긴다.
비평의 온도도 그 결을 따라간다. 메타크리틱은 77점으로 전반적으로 호평권에 놓였고, 로튼토마토는 신선도 86퍼센트로 ‘시대 디테일과 디카프리오의 하강 곡선 연기’를 강점으로 요약한다. 나는 이 평가에 대체로 동의한다. 특히 디카프리오는 휴즈를 “괴짜”로 소비하지 않고, 매력과 공포를 같은 얼굴에 배치한다. 케이트 블란쳇의 캐서린 헵번은 영화에 숨을 불어넣는 리듬 장치처럼 기능하는데, 대사 톤과 몸짓이 장면의 템포를 바꿔버린다. 누군가는 이 연기를 과장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시대 스타의 말맛’을 의도적으로 불러온 선택으로 읽혔다.
수상 성적은 이 영화가 기술과 미술의 성취로도 강하게 기억된다는 증거다.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이트 블란쳇의 여우조연상 수상과 함께 미술감독상, 촬영상, 의상상, 편집상 등 총 5개 부문을 수상했고,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촬영과 미술, 의상과 편집이 한꺼번에 인정받았다는 건, 《에비에이터》가 “이야기”뿐 아니라 “영화라는 형식 자체”로 시대를 구축했다는 뜻이라 생각한다.
야망의 전진을 외치고 결핍은 후퇴를 말한다
《에비에이터》를 보고 나면 ‘성공’의 정의를 다시 세게 된다. 휴즈는 누구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고, 실제로 그 높이에 도달한다. 그런데 영화는 질문을 바꿔 던진다. 어디까지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올라가는 동안 무엇을 잃었느냐고. 나는 영화를 본 날 집에 돌아와 문을 잠그는 순간, 영화 속 휴즈처럼 손잡이를 한 번 더 확인하려는 충동이 스치듯 지나가는 걸 느꼈다. 물론 나는 그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지만, 불안이 습관으로 변하는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그 짧은 순간에 이해하게 됐다.
이 작품이 주는 교훈은 거창한 자기계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현실적인 결론에 가깝다. 첫째, 성취를 만드는 동력과 사람을 갉아먹는 집착은 같은 연료를 쓸 수 있다. 둘째, 주변의 사랑과 신뢰는 재능의 부속품이 아니라 생존 장치다. 셋째, 기술과 자본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나 자신을 돌보는 속도’도 같이 설계해야 한다. 휴즈는 시대를 앞서갔지만, 자기 마음을 관리하는 방식은 끝내 찾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에비에이터》를 “야망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경고등”처럼 기억한다. 꿈을 크게 잡는 건 멋진 일이다. 다만 그 꿈이 삶 전체를 잠식할 때, 어떤 신호가 켜지는지 미리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비행은 아름답지만,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오히려 고요한 방 안에서 반복되는 말과 멈춰버린 시선이다. 하늘을 정복한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전기영화를 오래 붙잡아두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