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R》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남자의 외로움과 사랑의 형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점점 느슨해진 사회에서, 인공지능 운영체제와의 교감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을 가진다. 이 영화는 기술의 진보를 경이로움으로 포장하기보다, 인간의 감정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말한다. 따뜻한 색감의 화면과 부드러운 음악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며, 사랑의 정의가 얼마나 유동적인지 조용히 보여준다.
개봉: 2013
감독: 스파이크 존즈
장르: 로맨스, SF, 드라마
출연: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
평점: 메타크리틱 90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94%
목소리로 시작된 관계
테오도르는 타인의 감정을 대신 써주는 편지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그는 사랑과 위로의 문장을 누구보다 능숙하게 다루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아내와의 이혼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혼자 사는 집 안은 늘 고요하다. 그의 하루는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 한가운데서도 어딘가 비어 있는 상태로 흘러간다.
어느 날 테오도르는 새로 출시된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설치한다. 스스로 이름을 선택한 사만다는 단순한 음성 안내를 넘어, 질문을 던지고 농담을 건네며 감정을 학습한다. 처음에는 편리함에 가까운 관계였지만, 대화가 쌓일수록 테오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사만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외면해왔던 감정의 빈틈을 자연스럽게 파고든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연인의 형태로 변해간다. 함께 음악을 듣고, 일상을 공유하며, 감정을 나눈다. 사만다는 몸이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면서도, 테오도르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대리인을 통해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은 이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 질문 위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테오도르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전보다 더 깊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만다는 인간과 다른 속도로 성장한다. 수천 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의 사고로 확장된다. 그녀의 변화는 테오도르에게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안긴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존재 사이의 간극 또한 분명해진다. 결국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포함한 인간들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남겨진 테오도르는 상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사랑의 정의를 다시 묻다
《HER》의 감상 포인트는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에 있다. 영화는 인공지능과의 사랑을 기이한 사건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외로움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누군가의 목소리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조용히 설득한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끌린 이유는 그녀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시작을 아주 사소한 계기로 보여준다.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고백 없이도 관계는 시작될 수 있다. 일상의 대화, 감정의 공유, 침묵 속의 이해가 사랑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로맨스의 공식과는 다른 결을 가진다.

영화는 사랑의 확장과 균열을 동시에 그린다. 사만다가 성장할수록 테오도르는 상대적으로 정체된 존재로 남는다. 이 차이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를 넘어,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변해버릴 때 느끼는 불안과 닮아 있다. 영화는 이를 갈등으로 과장하지 않고, 담담한 대화와 침묵으로 표현한다.
결말에서 《HER》는 이별을 파괴가 아닌 통과의례처럼 다룬다. 사만다의 떠남은 테오도르를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그가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인간 관계로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옥상에 앉아 도시를 바라보는 테오도르와 에이미의 모습은, 사랑이 끝난 이후에도 사람이 사람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외로움 이후의 풍경
《HER》는 사랑의 형태를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감정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목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가 믿어온 관계의 기준은 얼마나 유연한가. 이 영화는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이 영화에서 조심스럽게 흔들린다. 그러나 동시에, 진심 어린 이해와 공감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된다. 《HER》는 쓸쓸하지만 차갑지 않고, 아프지만 잔인하지 않다. 만약 사랑이 한 번쯤 다른 형태로 다가온 적이 있다면, 이 영화는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누군가와 나눈 대화의 온도를 떠올리게 한다. 《HER》는 조용히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큰 사건 없이도,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