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 미제라블》은 19세기 프랑스의 혼란을 배경으로 장발장의 삶을 따라간다. 영화는 음악이 대사를 대신하는 뮤지컬 영화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화면 안에서 감정이 곧장 터져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짧게 말해, 한 번 낙인 찍힌 인생이 한 사람의 용서로 새 길을 얻고 그 변화가 사회가 말하는 정의의 기준과 충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혁명의 잔불이 남은 시대의 공기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지켜보게 하는 작품이다.
개봉: 2012
감독: 톰 후퍼
장르: 뮤지컬, 드라마, 시대극
출연: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앤 해서웨이, 아만다 사이프리드, 에디 레드메인
평점: 메타크리틱 63점, 로튼토마토 신선도 70% 내외
한 번의 용서가 바꾼 삶
1815년.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을 복역하고 가석방된 장발장은 세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는 피로와 굶주림 끝에 한 성직자의 집 문을 두드린다. 미리엘 주교는 묵묵히 식탁을 내어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장발장은 절망과 습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다. 이튿날 병사들에게 붙잡혀 돌아온 그에게 주교는 은식기가 선물이라며 은촛대까지 보태어 준다. 이 뜻밖의 자비는 장발장에게 죄수라는 자기 인식을 무너뜨리는 충격이 된다. 그는 주교의 말대로 선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과거의 이름을 버린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다른 도시에서 사업가이자 시장으로 살아간다. 일터에서는 일자리를 만들고 병원과 고아원에 도움을 보낸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오래된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가석방 조건을 어기고 사라진 전과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자베르가 그를 의심한다. 자베르는 법이 정한 선과 악을 단단한 선으로 믿는 인물이다. 그에게 장발장은 영원한 범죄자에 가깝다. 장발장이 선한 삶을 선택했더라도 과거의 죄는 지워질 수 없다는 신념이 자베르를 움직인다.

한편 장발장은 가난과 모멸 속에 내몰린 판틴을 보살피지 못한 책임을 느끼고, 그녀의 딸 코제트를 찾아 데려온다. 그는 아이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약속하고 도시를 떠난다. 코제트가 자라던 1832년. 파리에는 다시금 들끓는 공기가 감돈다.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거리에서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 바리케이드를 세운다. 그 한가운데서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청년 마리우스를 지키기 위해 장발장은 위험을 무릅쓴다. 그는 포로가 된 자베르를 죽일 기회를 얻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대신 묶인 줄을 풀어 준다. 자비가 법보다 먼저라는 그의 선택은 자베르의 세계관을 무너뜨린다.
결전의 밤이 지나고 바리케이드는 무너진다. 장발장은 중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하수도로 업고 나와 목숨을 건다. 자베르는 그들을 기다리지만 장발장의 선택 앞에서 더 이상 확신을 유지하지 못한다. 법만이 절대적이라고 믿어온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장발장은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앞날을 위해 조용히 물러난다. 자신의 과거가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해칠까 두려워 거리를 두지만, 결국 코제트는 아버지 같은 그를 이해한다. 임종의 순간, 장발장은 주교의 촛불 아래에서 평화를 얻는다. 한 사람의 자비에서 시작된 변화가 끝내 또 다른 자비로 완성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혁명의 거리에서 울린 노래
이 작품의 여운이 길게 남는 이유는 이야기의 구조가 단출해서가 아니다. 영화는 법의 언어와 양심의 언어가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다는 점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장발장은 전과자라는 현실을 안고 살아가지만 미리엘 주교의 자비를 통해 자기 존재를 새로 정의한다. 이때 변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기준이다.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눈금 자체가 바뀌면서 그는 타인에게 빚진 은혜를 책임으로 전환한다. 반대로 자베르는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직선적 판단으로 살아간다. 그에게 정의는 법의 집행과 거의 같다. 그래서 장발장의 선함은 자베르에게 오류처럼 보인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의 거울이 되어 각자의 결을 드러내게 한다.
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는 파리의 거리는 인물들의 내면을 비춘다.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와 바리케이드의 목재 냄새는 단지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정의의 자리 바꿈을 상징한다. 무엇이 공정한가라는 물음 앞에서 사회는 빠르게 답을 내리지만 개인의 삶은 그렇지 않다. 장발장이 자베르를 살려 보내는 장면은 그 간극을 명확히 한다. 법이 가리키는 방향과 양심이 이끄는 방향이 다를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영화는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선택의 비용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장발장이 도시의 밑바닥을 통과하는 여정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의식의 통로처럼 보인다. 그는 하수도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그림자를 통과한다. 그 끝에서 만나는 새벽은 개인의 구원일 뿐 아니라 누군가의 내일을 위한 약속이 된다.
뮤지컬 영화로서의 미덕도 분명하다. 인물의 독백을 노래로 치환한 순간들에서 감정의 진폭이 커진다. 판틴의 노래는 절망이 어떻게 품위를 잃지 않는지 보여 주고, 장발장의 기도는 책임과 사랑이 같은 단어의 다른 면임을 들려준다. 배우들은 현장에서 라이브로 노래했고 카메라는 숨을 참듯 얼굴을 붙잡는다. 숨소리와 떨림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에 장면이 무대의 완결성을 갖추면서도 영화적 친밀함을 얻는다. 음악은 대사가 할 수 없는 서술을 대신하고, 프레임은 음표 사이의 침묵을 채운다. 이 조합이 만드는 밀도 덕분에 혁명의 함성도 개인의 고백도 한 호흡 안에 들어온다.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고찰은 결국 타자를 향한 시선으로 모인다. 장발장이 과거의 자신을 죄수로만 보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구조할 힘이 생긴다. 자베르는 자신이 믿어 온 직선이 흔들리는 순간 무너진다. 그가 맞닥뜨린 것은 장발장의 선함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닫힌 세계다. 정의가 제도나 처벌의 총합을 넘어서려면 타인의 사정을 끌어안는 여지, 다시 말해 자비의 빈칸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히 말한다. 혁명은 거리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의 기준이 바뀌는 순간에도 혁명은 일어난다.

《레 미제라블》은 한 인간의 변화가 시대의 균열을 건너는 과정을 노래와 이미지로 기록한다. 영화는 법의 문장과 양심의 문장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내놓는 답은 단순하지 않다. 다만 한 번의 자비가 한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삶을 지켜 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과거의 이야기이면서 오늘의 이야기다. 스크린을 떠나도 오래 머무는 노래와 시선 덕분에 우리는 각자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