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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윌리엄스 주연 죽은 시인의 사회(1989) 영화 리뷰

by dreamobservatory 2026. 2. 15.

영화-죽은-시인의-사회-포스터
죽은 시인의 사회 포스터

 명문 기숙학교 웰튼의 교실에는 규율이 먼저, 생각은 나중이다. 그런데 한 교사가 들어오자 학생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책장을 찢고 책상 위에 올라서며, “지금”을 붙잡으라고 말하는 수업. 《죽은 시인의 사회》는 좋은 선생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끝내는 청춘이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고 또 어떻게 다시 서는지까지 보여준다. 누군가는 자유를 배운 대가로 침묵을 강요받고, 누군가는 그 침묵을 깨기 위해 일어선다.

개봉: 1989
감독: 피터 위어
장르: 드라마
출연: 로빈 윌리엄스, 로버트 숀 레너드, 에단 호크, 조시 찰스
평점: 메타크리틱 79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85%

교실이 숨을 쉬기 시작한 날

 1959년, 웰튼 아카데미에 신입생 닐 페리와 토드 앤더슨이 입학한다. 학교는 전통과 규율을 내세우며 학생들을 ‘성공’이라는 단어에 맞춰 정렬한다. 새 학기, 영어 교사 존 키팅이 부임한다. 그는 첫 수업부터 학생들을 복도로 데리고 나가 졸업생 사진을 보여주며 삶의 유한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교과서의 ‘시를 점수화하는 방식’을 거부하게 만들고, 수업을 교실 밖으로 꺼낸다. 학생들은 키팅의 권유로 과거 선배들이 만들었던 비밀 모임 ‘죽은 시인의 사회’를 부활시켜, 밤마다 동굴에 모여 시를 읽고 서로의 꿈을 말한다.

 닐은 그곳에서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연기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는 학교 연극에 지원해 주연으로 뽑히고, 키팅은 그 선택을 응원한다. 하지만 닐의 아버지는 의대를 강요하며 연기를 금지한다. 닐은 몰래 무대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공연은 성공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연장을 찾아와 분노하고, 닐을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선언한다. 닐은 집으로 돌아간 밤,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학교는 사건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려 하고, 학생들에게 ‘키팅이 위험한 사상을 주입했다’는 진술서에 서명하게 한다.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대부분이 서명한다. 키팅은 해고 통보를 받고 교실에 마지막으로 들른다. 그 순간, 토드가 먼저 책상 위에 올라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친다. 곧 몇몇 학생들이 뒤따른다. 키팅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본 채 교실을 떠난다.

카메라가 말하는 것들, 침묵이 쌓는 비극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대사보다 ‘구도’가 먼저 감정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웰튼의 공간은 대칭과 직선으로 정돈되어 있다. 복도와 교실을 길게 잡는 쇼트는 학생들이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작은지 보여주고, 교장실이나 가정 장면에서는 프레이밍이 더 답답하게 조여 온다. 반대로 키팅이 있는 장면은 리듬이 다르다. 인물들의 동선을 넓게 열어두고, 학생들의 표정이 살아나는 순간에는 얕은 심도처럼 시선이 한 점으로 모이도록 연출한다. 규율의 프레임 안에서 ‘호흡할 틈’을 만들어주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날카롭게 느껴졌던 건, 닐의 선택으로 향하는 흐름이 ‘한 번에 폭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작은 압박을 여러 겹으로 쌓는다. 아버지의 권위적인 말투, 학교의 숨막히는 분위기, 친구들 앞에서조차 완전히 말하지 못하는 닐의 눈빛. 그래서 공연 성공 직후의 환희가 오히려 불안하다. 무대 뒤에서 닐이 숨을 고르는 장면을 볼 때, 나는 예전에 중요한 발표를 끝내고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던 순간이 떠올랐다. “잘했는데 왜 안심이 안 되지”라는 느낌. 닐도 그 지점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축하를 받는 순간에도 집이라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영화-죽은-시인의-사회-스틸컷-교사와-학생들
죽은 시인의 사회 스틸컷

 각본은 자유를 말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권위를 재현하는 영화’다. 톰 슐먼의 대사는 키팅을 매력적으로 만들지만, 이야기의 칼날은 학생들에게 더 깊이 들어간다. 그 균형이 평가를 갈라놓기도 했다.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가 주제와 메시지를 사랑하게 만들기보다 ‘선생을 사랑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 지적은 꽤 아프게 맞는다. 키팅의 카리스마가 너무 빛나서, 관객이 시 자체보다 인물의 매력에 기대어 감동하기 쉬운 구조이기도 하니까. 다만 나는 그 “선생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10대의 현실에 가깝다고 느꼈다. 어떤 문장보다, 어떤 철학보다, 먼저 누군가의 눈빛과 태도가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 시기가 있으니까.

 반대편의 시선도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품위 있는 감동’을 만들기 위해 갈등을 다소 교과서적으로 배치했다고 보고, 특히 중산층적 낭만주의에 기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작품의 영향력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고,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시간이 지나며 학교와 교육, 청소년 정신건강, 권위주의 문화에 대한 토론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텍스트가 되었고, 마지막 책상 위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저항의 이미지’ 중 하나로 남았다.

내가 ‘오늘’을 미루는 방식에 대하여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나도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문장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더 구체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해서, 무엇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나. 영화 속 학생들은 ‘시간’이 아니라 ‘허락’을 기다린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누군가의 승인 도장을 필요로 한다. 그 구조는 학교를 벗어난 뒤에도 의외로 오래 따라온다. 나 역시 중요한 선택 앞에서 “지금 말하면 손해 볼까” “조금 더 준비되면” 같은 말을 습관처럼 붙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준비는 끝이 없고, 그 생각은 때때로 내 욕망을 안전하게 포장하는 알리바이가 되곤 했다.

 키팅이 던진 ‘카르페 디엠’은 낭만적인 주문이 아니라, 미루는 기술에 길든 사람에게 주는 경고처럼 들린다. 다만 영화가 말하는 용기는 무모함과 다르다. 토드가 마지막에 책상 위로 올라서는 건 갑자기 용감해져서가 아니라, 침묵의 결과를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멋있다”로 끝나지 않고, 내 현실로 넘어온다. 나는 어떤 순간에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나. 그리고 그 침묵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큰 무게로 전달될까.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건 교훈 한 줄이 아니라, 선택의 방식이다. 매일의 작은 결심이 쌓여 삶의 윤곽을 만들고, 그 윤곽이 누군가를 살리기도, 몰아붙이기도 한다. 오늘 하루라도 나 자신에게 더 정직해지는 쪽으로 기울여 보고 싶다. 거창한 선언 대신, 내 안의 목소리를 작게라도 듣는 연습부터.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내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