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가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머리가 좋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다가오면 그 사람부터 밀어내는 것. 《굿 윌 헌팅》은 “재능을 발견하는 이야기”로 시작해 “상처를 회복하는 이야기”로 끝난다. MIT의 복도에서 우연히 드러난 한 청년의 천재성은, 수학 문제보다 훨씬 복잡한 삶의 방정식을 끌어낸다. 왜 그는 기회를 보면 도망치고, 사랑을 마주하면 싸움을 걸까.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빛나는 천재성이 아니라, 그 반짝임 뒤에 숨은 상처를 정확히 비춰주기 때문이다.
개봉: 1997
감독: 거스 밴 샌트
장르: 드라마
출연: 맷 데이먼, 로빈 윌리엄스, 벤 애플렉, 스텔란 스카스가드, 미니 드라이버
평점: 메타크리틱 71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97%
칠판 위 수학은 풀리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어렵지
사우스 보스턴에서 자란 윌 헌팅은 MIT의 청소부로 일한다. 낮에는 바닥을 닦고, 밤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MIT 복도에 게시된 난제 하나를, 윌이 아무렇지 않게 풀어버린다. 문제를 낸 수학 교수 램보는 이 학생이 누구인지를 찾기 시작하고, 마침내 윌이 그 천재의 주인공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윌의 삶은 ‘발견’ 이후 더 꼬인다. 그는 폭행 사건으로 법정에 서고, 판사는 재능을 아깝게 여긴 램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건은 두 가지다. 수학 연구에 참여할 것, 그리고 심리 상담을 받을 것. 윌은 여러 치료사를 말로 농락하며 시간을 버린다. 그때 램보는 마지막 카드로, 자신의 옛 친구이자 심리학 교수인 숀 맥과이어를 찾아간다.
숀과의 첫 만남부터 윌은 공격적으로 나온다. 숀의 그림을 조롱하고, 사생활을 건드리며 선을 넘는다. 하지만 숀은 윌의 말빨에 휘둘리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필요할 때는 기다리며 그가 가진 방어기제를 무너뜨린다. 한편 윌은 하버드의 스카일라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불안해진다. 언젠가 버림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앞서 달린다.
수학 분야의 커리어 기회도 쏟아진다. 정부기관 면접, 대기업 채용, 연구직 제안. 윌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존중하는 친구 척키는 윌에게 직언을 한다. 네가 그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낭비라고. 그럼에도 윌은 끝까지 버틴다. 그러다 숀과의 상담에서, 숀이 반복해서 말하는 한 문장이 그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네 탓이 아니야.” 윌은 처음엔 비웃지만, 끝내 감정이 터지고 숀에게 매달린 채 무너진다.
그 순간 이후 윌은 선택을 시작한다. 램보가 설계한 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 그는 “가야 할 곳이 있다”는 쪽지를 남기고 차를 몰아 떠난다. 사랑하는 스카일라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상처 투성이 과거 때문에 겁 먹어서도, 누가 시켜서도 아닌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말이 빠른 천재를 찍는 법, 숨을 느리게 만드는 연출
《굿 윌 헌팅》의 미덕은 자극적인 사건을 덧칠하지 않는 데 있다. 거스 밴 샌트의 연출은 윌의 천재성보다 관계의 온도를 더 오래 붙잡는다. 대화 장면이 많지만, 영화는 말의 속도만 믿지 않는다. 프레이밍과 리듬이 감정의 방향을 정리해준다. 특히 술집에서 윌이 엘리트 학생을 논파하는 장면은 통쾌한 말싸움처럼 보이지만, 곧바로 영화는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곳에 묶여 있는가”로 질문을 돌린다. 똑똑함은 무기인데, 윌은 그 무기를 자신에게 겨누고 있다.
촬영은 과장보다 현실감을 택한다. 보스턴의 겨울 공기처럼 차갑고 담백한 톤, 인물 가까이 붙는 숏 구성, 불필요한 화려함을 걷어낸 카메라 움직임이 윌의 삶을 ‘기록’하는 느낌을 만든다. 대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승패를 판정하듯 휙휙 자르지 않고, 상대의 표정이 바뀌는 시간을 견딘다. 숀의 집에서 둘이 마주 앉아 말이 줄어드는 순간, 화면의 정적이 오히려 큰 소리를 낸다. 이 영화는 대사가 많아도 결국 표정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성장담의 익숙한 골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윌을 교정’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윌은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 전에, 오래 버텨온 생존자다. 그래서 숀이 던지는 조언은 훈계가 아니라 “너는 이미 충분히 버텼다”는 인정으로 들린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는 그 인정의 설득력을 완성한다. 그는 웃기려고 들어오는 순간에도, 웃음의 끝자락에서 상실의 그림자를 남긴다. 벤치 장면에서 숀이 삶을 이야기할 때, 그 말은 지식 과시가 아니라 체온을 가진 경험담으로 나온다.
로튼토마토의 평론가 총평은 이 작품이 예측 가능한 흐름을 갖고도 ‘강한 연기와 감정의 밀도’로 끝까지 끌고 간다고 요약한다. 메타크리틱에 모인 평들 역시 익숙한 재료를 다루면서도 연기와 추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남긴다. 내 감상은 이렇다. 클리셰 여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클리셰를 이용하는 방식인데, 이 영화는 정답을 맞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이 무서운 사람을 설득하는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그래서 마지막 선택이 값싸거나 어리석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품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로빈 윌리엄스)과 각본상(맷 데이먼, 벤 애플렉)을 수상했고, 주요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젊은 재능의 등장을 알린 영화”를 넘어, 상처와 상담의 관계를 대중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사례로도 자주 언급된다. 이후 수많은 작품이 상담실 대화라는 공간을 감정의 클라이맥스로 사용했는데, 《굿 윌 헌팅》이 그 길을 넓힌 셈이다.
내가 무너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때, 인생은 조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다. “나는 지금 무엇을 피하고 있나”. 윌은 기회가 없어서 멈춘 게 아니다. 오히려 기회가 너무 많아서 도망친다. 선택하면 책임이 따라오고, 책임은 실패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 실패가 나라는 사람의 가치까지 무너뜨릴까 봐 겁을 낸다. 그래서 그는 안전한 패턴을 반복한다. 친구들과의 익숙한 밤, 같은 동네, 같은 농담. 상처가 재발하지 않는 자리만 고집하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연결하면,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순간 이상하게 딴짓이 늘어나는 때가 있었다. 준비는 오래 하는데 실행은 늦고, “아직 완벽하지 않아서”라는 핑계가 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완벽주의가 아니라 자기방어였다. 제대로 해보고 실패하면 변명의 공간이 사라지니까. 윌이 스카일라에게 가까워질수록 거칠어지는 장면을 볼 때, 그때의 내 모습이 겹쳤다. 사랑이든 일이든, 가까워질수록 잃을 것도 커진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먼저 돌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숀의 상담 방식은 마술이 아니라 노동에 가깝다. 그는 윌의 말을 반박하기보다, 윌이 자기 이야기로 돌아오게 만든다. 특히 “네 탓이 아니야” 장면은 명대사로만 소비되기 쉽지만, 영화 안에서는 전략적으로 쌓여온 결과다. 숀이 그 말을 꺼낼 수 있게 된 건, 윌이 숀의 상처(아내의 죽음)를 함부로 건드렸던 날 이후다. 숀 역시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오히려 관계를 ‘상호적’으로 만든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고치는 구조가 아니라, 둘 다 인간으로 서 있는 구조. 그래서 그 문장이 진짜로 들린다.
마지막에 윌이 차를 몰고 떠나는 결말도 멋진 판타지가 아니라 실천의 형태다. 이 영화는 “천재라서 성공했다”가 아니라 “상처를 인정했더니 움직일 수 있었다”로 끝난다. 결국 재능은 방향을 잡아주는 엔진이고, 관계는 브레이크를 풀어주는 열쇠다. 내게 《굿 윌 헌팅》은 스펙이나 성취의 이야기가 아니라, 겁이 나도 한 발을 내딛는 법을 다시 배우게 한 작품으로 남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척키가 말하듯, 네가 가진 가능성을 네가 먼저 포기하면 주변 사람은 더 속상해진다. 가끔은 내 인생의 ‘기대치’를 남이 더 높게 잡을 때가 있다. 그게 부담일 때도 있지만, 그 부담이 곧 믿음일 수도 있다. 《굿 윌 헌팅》은 그 믿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킨다. 오늘도 미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윌처럼 머리로 설득하려 들기보다 한 문장부터 시작하면 된다. “나도 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