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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2022) 영화 리뷰 <잔잔한 여름날의 추억같은 영화>

by dreamobservatory 2025. 12. 31.

영화-애프터썬-포스터
애프터썬 포스터

 《애프터썬》은 한 여름의 휴가를 배경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더듬어 가는 영화다. 이 작품은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감정의 잔여물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햇빛이 강하게 내려쬐는 해변과 호텔의 평범한 풍경 속에서, 말로 설명되지 않는 관계의 균열과 사랑의 흔적이 천천히 스며든다. 《애프터썬》은 기억이란 무엇으로 남는지, 그리고 우리가 끝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품고 살아가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개봉: 2022
감독: 샬럿 웰스
장르: 드라마
출연: 폴 메스칼, 프랭키 코리오
평점: 메타크리틱 95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96%

기억 속 여름, 그때는 몰랐던 표정들

 영화는 성인이 된 소피가 과거를 떠올리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열한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떠났던 한 번의 여행이 자리하고 있다. 터키의 리조트, 햇볕에 바랜 수영장 타일, 객실 안의 거울, 그리고 캠코더로 찍힌 영상들. 그 여름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 캘럼은 다정하고 유머러스하다. 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수영을 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웃음을 건넨다. 그러나 그 미소 뒤에는 설명되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는 종종 혼자 남아 바다를 바라보고, 객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소피는 그 모습을 특별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그저 어른이란 그런 존재라고, 아버지는 원래 저렇게 조용해질 때가 있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인다.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 캘럼이 왜 힘들어 보이는지, 그의 삶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명확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소피의 시선에 머문다. 아이의 눈에는 아버지의 슬픔이 구체적인 언어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순간에 웃음이 조금 늦게 나오고, 어른들 사이에서 대화가 끊기는 틈이 길어질 뿐이다.

 여행이 이어질수록 소피는 조금씩 성장의 문턱에 서게 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어색한 설렘을 느끼고, 아버지와의 거리감도 미세하게 달라진다. 그녀는 더 이상 손을 잡고만 다니는 아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도 아니다. 그 애매한 시기에 캘럼은 여전히 그녀를 보호하려 애쓰지만, 동시에 자신의 무게를 숨기지 못한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현재의 소피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교차된다. 클럽의 어둠 속에서 성인이 된 소피는 음악과 빛에 휩싸여 있다. 이 장면들은 과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아직 그 여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감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남긴 흔적

 《애프터썬》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서사를 설명하는 대신 감정을 체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호함 속에 머물게 하며,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불러낸다. 캘럼의 우울은 명확한 사건으로 규정되지 않고, 소피의 사랑 역시 직접적인 고백 없이 전해진다.

 카메라는 인물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인물의 감정을 관찰하게 만든다. 이는 소피가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과 닮아 있다. 그녀는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영화는 그 미묘한 거리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캠코더 영상의 사용이다. 흔들리는 화면과 불완전한 프레임은 기억의 질감을 그대로 담아낸다. 완벽하게 기록되지 않은 장면들, 중간에 끊긴 대화, 초점이 맞지 않는 얼굴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의미를 얻는다. 당시에는 평범했던 순간들이, 나중에 돌아보면 결정적인 장면이 되어 있다.

영화-애프터썬-스틸컷-해변의-아버지와-딸
애프터썬 스틸컷

 이 영화는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언제 찾아오는지 묻는다.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부모의 불안과 외로움은, 어른이 된 뒤에야 선명해진다. 소피가 기억을 되짚는 이유는 과거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상태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프터썬》은 상실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을 깊게 남긴다. 어떤 관계는 끝났다는 사실보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마음이 더 오래 남는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 머문다. 끝내 다 말하지 못한 마음, 전하지 못한 위로,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이해가 조용히 겹쳐진다.

빛이 사라진 뒤에 남는 것

 《애프터썬》은 보고 나서 오래 남는 영화다. 장면 하나하나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감정의 잔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보낸 짧은 시간은 결국 한 사람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계속해서 다른 얼굴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는 조용한 밤에 혼자 보는 것이 잘 어울린다. 특별한 위로나 명확한 해답을 주지는 않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한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누군가의 얼굴이 있다면, 혹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앞에서 뒤늦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애프터썬》은 그 마음을 가만히 받아줄 것이다. 여름은 지나가고, 햇빛은 사라지지만 기억은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을 통해 조금씩 어른이 된다. 《애프터썬》은 그렇게 조용히 성장의 순간을 기록한 영화다. 쉽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분명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