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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2014) 영화 리뷰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지"

by dreamobservatory 2025. 12. 17.

영화-퓨리-포스터
퓨리 포스터

 《퓨리》는 2차 세계대전 말기, 전차 한 대에 몸을 싣고 전장을 횡단하는 다섯 명의 병사들을 따라간다. 이 영화는 전쟁을 거대한 전략이나 승리의 서사로 포장하지 않는다. 좁고 어두운 철갑 안에서 쌓여가는 공포와 피로,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기대야만 하는 인간들의 얼굴을 집요하게 비춘다. 포연과 진흙 속에서 전쟁은 더 이상 교과서의 사건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을 강요하는 잔혹한 현실로 다가온다.

개봉: 2014
감독: 데이비드 에이어
장르: 전쟁, 드라마, 액션
출연: 브래드 피트, 샤이아 라보프, 로건 러먼, 마이클 페냐, 존 번설
평점: 메타크리틱 64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76%

강철 안에서 살아남는 법

 1945년, 독일 전선의 끝자락. 미군 제2기갑사단 소속 전차 ‘퓨리’는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살아남은 베테랑들의 공간이다. 전차장 워대디는 냉혹하고 단호하다. 그는 부하들에게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체계와 명령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한 승무원들은 이미 전쟁에 길들여진 얼굴을 하고 있다. 거친 언행과 잔혹한 행동은 이들에게 방어막이자 생존 수단이다.

 이 폐쇄된 세계에 신병 노먼이 투입된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그는 타자기 앞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던 병사였다. 갑작스럽게 기관총 사수가 된 노먼은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적군에게 방아쇠를 당기길 주저한 노먼은 소대장의 죽음을 초래한다. 워대디는 노먼을 몰아붙인다. 선택할 시간은 없다. 쏘지 않으면 죽고, 쏘면 살아남는다. 전쟁의 규칙은 단순하면서도 잔인하다.

 《퓨리》의 전차전은 놀라울만큼 사실적이다. 포탄이 장갑을 스칠 때 울리는 금속음, 궤도가 진흙을 갈아내는 소리, 내부를 가득 채운 화약 냄새까지. 영화는 관객을 전차 밖에서 구경시키지 않는다. 철갑 안으로 밀어 넣고, 그들의 시선과 호흡으로 전투를 체험하게 만든다. 전차 간의 교전은 마치 거대한 포식자들이 서로를 노려보는 싸움처럼 묘사된다.

 전장을 지나며 노먼은 점점 변한다. 처음엔 총을 쥐는 손이 떨렸지만, 어느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진다. 생존을 위해 감정을 눌러 담는 법을 배워간다. 전우들의 거친 농담과 냉소 속에서 그는 전쟁의 언어를 익힌다. 이 변화는 영웅적 각성이 아니라,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과정에 가깝다. 순수함이 벗겨지고, 남은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뿐이다.

 다른 전차들은 모두 파괴되고 퓨리 혼자만 남은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퓨리의 궤도마저 파괴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최악의 상황에서 진군하는 수백명의 독일군을 발견하게 되고 워대디와 부하들은 도망가는 대신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길을 택한다. 혈전 끝에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지만 노먼을 제외한 모든 전우가 전사한다.

전쟁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퓨리》의 감상 포인트는 전투의 박력보다 인물의 변화에 있다. 특히 노먼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겹친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다. 그러나 전투를 거치며 공포는 무뎌지고, 판단은 빨라진다. 전투를 거듭하며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왜 싸우는지보다, 지금 무엇을 해야 살아남는지가 중요해진다. 이 과정은 결코 통쾌하지 않다. 오히려 마음 한켠을 서늘하게 만든다.

영화-퓨리-스틸컷-교전중인-전차
퓨리 스틸컷

 워대디 역시 단순한 냉혈한으로 남지 않는다. 그는 전차를 가족처럼 여기며,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인물이다. 전쟁 이전의 윤리를 버린 대가로 그는 살아남았고, 그 선택의 무게를 혼자 짊어진다. 노먼에게 가혹하게 군 이유 역시 같다. 전쟁에서 착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 고장 난 전차 ‘퓨리’가 교차로에 멈춰 서는 장면은 극의 정점을 이룬다. 후퇴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워대디는 남기로 결정한다. 다가오는 독일군 대대를 상대로, 단 한 대의 전차가 길을 막는다. 이 전투는 전략적으로 무모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장은 이미 계산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버텨온 시간과 서로를 향한 신뢰가 마지막 선택을 만든다.

 클라이막스의 전투는 처절하다. 어둠 속에서 포탄이 터지고, 총성이 밤공기를 찢는다. 한 명씩 쓰러지는 전우들, 그리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노먼의 모습은 그가 더 이상 신병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승리의 쾌감을 주지 않는다. 대신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조용히 남긴다.

강철의 잔해 위에 남은 얼굴

 《퓨리》는 전쟁 영화이지만, 총성과 폭발 뒤에 남는 얼굴을 기억하게 만든다. 전차라는 강철의 보호막은 동시에 감옥이 된다. 그 안에서 병사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텼고,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잃었다. 노먼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축복이자 저주다. 그는 이제 전쟁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영화는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전쟁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그 요구를 감당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남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사실적인 전차전과 밀도 높은 인물 서사가 어우러진 《퓨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전쟁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에게도, 인간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로 충분히 다가올 작품이다.  화려함 대신 묵직함을 선택한 이 영화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의 침묵을 오래도록 남긴다. 그 침묵이 마음에 남는다면, 《퓨리》는 분명 한 번쯤 마주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