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위 어딘가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섬. 과학과 신화, 모험과 철학이 한데 엮인 세계에서 아이들은 날아오르고 어른들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단순한 모험담처럼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관객에게 남는 것은 ‘기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이다. 하늘을 나는 성과 고대 문명의 잔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선택은 지금의 세계와도 낯설지 않게 겹쳐진다.
개봉: 1986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장르: 애니메이션, 판타지, 어드벤처, SF
출연: 타나카 마유미, 요코자와 케이코
평점: 메타크리틱 98점 / 로튼토마토 신선도 95%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 땅에서 시작된 모험
광산 마을에서 일하던 소년 파즈의 일상은 하늘에서 한 소녀가 떨어지면서 단번에 뒤집힌다. 군대와 정부 조직에게 쫓기던 시타는 ‘비행석’이라 불리는 신비한 돌을 지니고 있었고, 그 힘으로 공중에서 추락을 멈춘 채 파즈 앞에 내려온다. 이 작은 만남은 곧 거대한 세계로 이어진다.
시타는 전설 속 공중 도시 라퓨타의 혈통을 잇는 존재다. 비행석을 노리는 군과 해적 도라는 각자의 목적을 품고 시타를 추적한다. 파즈와 시타는 도라 일행과 묘한 동행을 시작하며 라퓨타의 실체에 한 발짝씩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모험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두 아이의 감정을 차분히 쌓아 올린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라퓨타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자연과 기계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는다. 무스카는 라퓨타의 힘을 무기로 삼아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시타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시타가 내리는 결정은 라퓨타를 지키기 위한 것이자, 인간을 위한 단절의 선언이다. 하늘에 떠 있던 섬은 무너지고, 남은 것은 땅과 사람, 그리고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다.
움직임과 공간으로 설계된 세계
《천공의 성 라퓨타》를 다시 보며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공간 연출의 밀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롱 쇼트와 패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하늘과 땅의 거리감을 체감하게 만든다. 비행선이 구름을 가르며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속도감보다 부유감이 강조되고, 이는 관객이 캐릭터와 함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을 갖게 한다.
작화 역시 인상적이다. 손으로 그린 셀 애니메이션 특유의 질감은 기계 문명조차 따뜻하게 보이게 만든다. 특히 라퓨타 내부의 정원 장면에서 자연광을 연상시키는 색채 배치는 기술 문명이 도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파괴가 아닌 공존이라는 선택지가 이미 화면 속에 존재하는 셈이다.

서사는 직선적이지만 단순하지 않다. 권력과 기술의 결합이 어떻게 폭력으로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힘을 내려놓는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 차근차근 보여준다. 평론가들 사이에서 《천공의성 라퓨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이 가장 명확하게 정리된 작품으로 자주 언급된다. 로튼토마토에서는 “모험의 형식을 빌린 윤리적 우화”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 지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파괴의 주문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화려한 연출 대신, 모든 것이 조용히 무너져 내리는 연출은 선택의 무게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판단의 책임을 넘겨준다.
가질 수 있는 힘과 내려놓아야 할 용기
《천공의 성 라퓨타》는 기술의 발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힘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태도다. 무스카는 라퓨타를 지배의 도구로 바라보고, 시타는 그 힘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술을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자와 저항하는 자의 대비는 오늘날의 기술 논쟁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편리함’을 명분으로 더 큰 힘을 요구하는지 떠올리게 됐다. 더 빠른 기술, 더 강한 시스템, 더 많은 통제. 그러나 영화는 그 끝에 무엇이 남는지를 이미 보여준다. 아무도 살지 않는 하늘의 성은 그 자체로 완성된 문명이었지만,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파즈와 시타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귀환이다. 땅으로 돌아와 다시 살아가는 것. 이 소박한 결말이 오히려 영화 전체를 단단하게 만든다. 《천공의 섬 라퓨타》는 화려한 상상력으로 시작해, 결국 아주 현실적인 질문으로 끝난다. 우리는 어떤 힘을 가져야 하고, 어떤 힘은 포기할 수 있는가.